접속자 : 54 (회원 0)  전체순위 출근기록  오늘 495 어제 574 최대 928 전체 700,972  
중국조선족작가넷

  ● 延邊作家協會主瓣  

● 중국조선족문학포탈사이트

중국조선족작가넷 > 습작원지 > 수필문학 > 연변문학 2017년 2호 추천작품-교또에서 만난 윤동주(김호웅)
  공지사항    협회소개    문학광장    문단동태    문화카페    작가/평론    습작원지    기업광장    문학상  
  중국조선족작가넷 LOGIN
  
  
  ID저장  자동로그인
회원가입 아이디/비밀번호 찾기
시가문학
소설문학
수필문학
아동문학
기타
 수필문학 베스트 10
 
작성일 : 17-03-16 15:44
연변문학 2017년 2호 추천작품-교또에서 만난 윤동주(김호웅)
 글쓴이 : 작가협회
조회 : 5,301  

                          교또에서 만난 윤동주

                                                  김호웅




      지난해 12월 15일부터 24일까지 25년만에 9박10일 일정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이번 일본행은 교또의 리쯔메이간대학에서 열리는 “동아시아인의 기억:
아픔의 련대와 공통의 력사”라는 학술회의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동아시아일체형의 문화전사: 김학철연구사 개관”이라는 론문을 발표했다. 전쟁의 력사와 아픔을 넘어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선량한 인사들과도 도타운 우정과 사랑을 나눈 김학철의 폭넓은 인간애와 다문화주의사고방식은 아시아의 평화와 화해를 이룰수 있는 하나의 주추돌로 될수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교또에는 처음으로 가보는지라 천년고도의 유적지들을 두루 둘러보고싶었다. 더우기 도지샤대학과 교또조형예술대학 교정에 세워진 윤동주의 시비를 보고싶었다. 하지만 주최측에서 배려한 관광일정에는 이 두곳에 대한 답사코스가 없었다.

      우리는 주최측에서 안내하는대로 교또에서 뻐스로 두어시간 달리면 닿을수 있는 마이즈루(舞鹤)라는 바다가로 갔다. 젖무덤 같은 크고작은 섬들에 둘러싸인 내해(內海)는 쪽빛물감을 풀어놓은것 같고 너무나 잔잔하고 고요했다. 하지만 70여년전 이 아름다운 바다에 수백명의 조선인들이 수장(水葬)되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찌 알수 있었으랴.

      1945년 8월 24일, 조선인들을 태우고 아오모리현(青森县)에서 출항해 한국 부산으로 가던 우끼시마 마루(浮岛丸)호는 마이즈루 앞바다에서 폭발해 조선인 524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아오모리 등지에서 강제로역에 시달리던 조선인 수천명이 해방의 희소식을 듣고 급급히 배에 올라 부산을 바라고 가던중이였다. 하지만 두번에 걸친 엄청난 폭음과 함께 배는 V자로 꺾인채 서서히 침몰되고말았던것이다.

      마이즈루에서 교또로 돌아오는 길에 단바(丹波)라는 곳에 들려 단바망간기념관을 견학했다. 단바망간기념관은 잡목들이 우거진 산중턱의 자그마한 분지에 있었다. 키가 구척인 리용식관장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일찍 메이지(明治)시대부터 개발하기 시작한 이 지역의 망간광산은 쇼와(昭和)중기에 와서 무려 3백여 광구로 확대되였다. 망간생산에 열을 올린 시기는 더 말할것도 없이 제2차세계대전중이였다. 망간이라는 물질은 용광로에서 철광을 용해할 때 섞어서 제철을 하면 엄청나게 견고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여러가지 무기, 특히 포신(炮身)을 만들 때는 망간이 필수불가결의 물질로 되였다.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용기로 쓰는 철에는 망간성분이 불과 3~8%인데 비하여 전쟁무기로 쓰는 포신 등에는 망간성분을 25~35% 섞지 않으면 대포를 쏠 때 포신이 녹아버린다고 한다. 이러한 전략물질을 대량 채굴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인력이 필요했고 이에 수많은 조선인과 중국인들을 강제로 동원했던것이다. 이 기념관의 창건자인 고 리정호(李贞镐) 초대관장이 남긴 증언에 따르면 단바광산에 투입된 로동력은 비단 조선에서뿐만아니라 이미 일본에 들어와있던 조선인들중에서도 강제로 징집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측은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한 사실을 은페하고 축소하기 위해 이들을 품팔이로동자라고 주장한다. 실제로는 이들 대부분이 일본 륙군의 명령으로 소집통고를 받았으며 만일 이를 기피한다면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여 심한 고문을 받을수 있었기때문에 소집에 응하지 않을수 없었다. 아무튼 이곳은 제2차세계대전중 수천명의 조선인들이 징용으로 끌려와 지하에서 우마와 같이 혹사당하고 죽어갔던 곳, 말하자면 일본판 만인갱(万人坑)이였다.

      우리 연변에서 온 친구들은 “이거 참, 머나먼 일본 교또에 와서 계급교양을 받는게 아니야?” 하고 살그머니 롱담을 주고받기도 했지만 우리와 같은 동족이 당한 참화라 눈물없이는 볼수 없었다. 특히 시도때도 없이 달려드는 일본 극우세력들의 집탈과 소란에 맞서서 2대째 26년간 이 망간기념관을 지키고있는 리용식 현임관장의 헌걸찬 체구와 강인한 눈빛이 우리를 사로잡았다.

      이제 체류시간은 반날 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는 교또역으로 가는 길에 도지샤대학에 들리기로 했다. 마침 류고꾸대학 교수로 있는 리상철박사, 전날 저녁 근사한 일식집에서 사시미와 스시에 일본 청주를 실컷 대접해준 리상철박사가 출근하는 길에 우리를 도지샤대학 서문까지 실어다주겠다고 했다.

      도지샤대학 서문에 들어서니 안경을 낀 작달막한 경비원아저씨가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붉은 벽돌로 지은 고풍스러운 교실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는데 서문으로 들어가 왼편으로 두번째 골목에 있는 교사옆에 자그마한 못이 있었고 그옆에 향수의 시인 정지용의 문학비와 나란히 윤동주의 문학비가 서있었다. 두 시인 다 도지샤대학출신이요, 도지샤대학의 자랑스러운 동문이다.

      축소문화를 지향하는 일본인들이 만든 조형물이라 문학비는 상상외로 작았다. 하지만 오늘날 이 대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의 정성이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생화를 꽂은 작은 꽃병들이 아기자기하게 문학비앞에 놓여있었고 윤동주의 미니초상화도 여러개 놓여있었다. 드문드문 예쁜 녀대학생들이 다가와 잠간 서서 묵도를 드리고 지나가군 했다.

      정지용의 문학비는 동그란 부채형모양을 갖추었고 윤동주의 문학비는 그의 성실한 인간성을 상징하듯이 네모반듯한 장방형모양을 갖추었다. 윤동주의 문학비 정면에는 그의 유명한 “서시”가 한국어와 일본어로 나란히 새겨져있었다. 그옆에 있는 해설문에 각별히 눈길이 끌렸다.

      “윤동주는 코리아의 민족시인이자 독실한 크리스챤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1917년 12월 29일, 북간도의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여났다.”고 하면서 그의 짧으나 아름다운 행적과 문학에 대해 소개하고있었다. 명동촌, 세 글자와 마주하는 순간, 연변에서 온 우리의 가슴은 뭉클해났다. 우리 연변의 명동촌에서 나서자란 젊은이가 어이하여 이 산 설고 물 선 타국에 와서 죽어야 했던가? 해설문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에 일본에 건너가 도지샤(同志社)대학의 문학부에 입학한다. 그는 도지샤대학에 재학중이던 1943년 7월 14일에 한글로 시를 쓰고있다는 리유로 독립운동의 혐의로 체포되였다. 재판결과 그는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징역형을 받고 후꾸오까감옥에서 복역하던중 1945년 2월 16일에 옥사했다. 이 시비는 도지샤대학 교우회코리아클럽의 발의에 의해 그의 영면 50돐인 1995년 2월 16일에 건립, 제막되였다.”

      문득 학사모를 쓴 준수한 청년이 비석에서 조용히 걸어나오는것 같았다.

      청년은 “창밖에 봄비가 속살거려/ 6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줄 알면서도/ 한줄 시를 적어볼가” 하고 읊조린다. 청년은 부모님이 고향 명동에서 보내오는 학비 덕분에 날마다 노트를 옆구리에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보통청년에게라면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일상일수도 있다.

      하지만 일제치하에 살고있는 청년은 혼자만의 안일함과 편안함에 도취될수 없었다. 부모님께 죄송하고 하나둘 사라진 동무들에게 미안하다. 더더구나 어려운 시국에 시를 쉽게 쓴다는 자체가 부끄럽고 죄스럽다. 청년은 마침내 등불을 밝혀 어둠을 헤치고 시대처럼 다가올 아침을 기다린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위안하고 비장한 결의를 다진다.

      이는 “쉽게 씌여진 시”라는 작품인데 윤동주가 일본류학시절에 마지막으로 남긴것으로 전해진다. 이 시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원했던 윤동주의 “서시”(1941)와 엄연한 대칭을 이루면서 그의 삶과 시 전체를 자아반성과 참회에 바탕을 둔 처절한 순교자적인 저항으로 일관하게 한다…

      신간선고속전철을 타고 도꾜로 가야 했기에 교또조형예술대학 교정에 있다는 윤동주의 시비는 볼수 없었다. 이곳은 윤동주가 일본 도지샤대학 류학시절에 류숙했던 아빠트가 있었던 곳으로서 시인이 창작의 불꽃을 지폈던 마지막 보금자리라고 한다. 하지만 찾아볼 시간이 없었다. 좀 아쉬웠지만 짧은 일정에 도지샤대학 교정에 있는 윤동주의 시비를 참배한것만 해도 가슴이 뿌듯했다. 교또에 갔다가 윤동주의 시비를 참배하지 못하고 돌아왔다면 한참은 죄의식에 시달려야 했을것이기때문이다.

      도꾜에 온 우리는 와세다대학 정문앞에 있는 유명한 오꾸마강당(大隈讲堂)앞에서 연변에 윤동주를 알려준 오오무라교수와 그의 제자 호테이박사를 만났다. 우리는 소고기덮밥으로 점심을 나누어 먹으면서 환담을 나누었다. 오오무라교수내외가 살고있는 이찌가와까지 찾아가고저 했으나 84세 고령의 로교수는 한시간 반 전철을 타고 달려와 와세다대학 정문앞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필자가 일년간 살았던 와게이쥬끄(和敬塾)까지 안내해주었다.

      그 수줍으면서도 인자한 미소는 조금도 변치 않았으나 허리는 새우등처럼 구부정했다. 3년전 연변에 “룡정윤동주연구회”가 출범해 활발하게 움직이고있다는 소식을 전했더니 무등 기뻐하면서 “연변에 한번 더 갈수 있으려나?” 하는 아쉬운 기색을 지었다. 오오무라교수는 최근 한국에서 펴낸 윤동주와 김용제에 관한 저서 두권을 필자에게 선물했다.

      일본에서 돌아온지도 여러날 되지만 밤에 눈만 감으면 조선인의 한이 서린 마이쯔루 앞바다와 단바망간기념관, 도지샤대학 교정에서 만난 청년 윤동주 그리고 윤동주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오오무라교수의 얼굴이 차례로 떠오른다. 참으로 천년고도 교또 주변에 우리 민족의 원혼이 그렇게 많을줄은 몰랐다. 윤동주는 오늘도 도지샤대학 교정에 서서 “모든 죽어가는것”들을 사랑하고 달래면서 시를 읊조리고있다. 바꾸어말하면 윤동주는 우리 룡정의 명동촌에서 태여났지만 이미 동아시아의 평화와 화해의 상징으로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동아시아인들의 마음속에 별처럼 살아있다.

      요즘도 일본정부는 어떠한가? 아베총리가 진주만에 가서 참배를 한 이튿날에 이나다 도모미 일본 방위상이 야스구니신사를 참배하는 아이로니를 연출하고있다. 하지만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동아시아인들은 일제지배하의 암흑속에서 “시대처럼 다가올 아침”을 기다리며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바랐던 저항시인 윤동주의 아름다운 시혼을 기리고있다.

      나는 이들 동아시아인의 화해와 단합에 의해 동아시아의 자유와 평화가 지켜지리라 확신한다.

      오늘밤에도 윤동주라는 찬란한 별이 내 마음의 호수에 조용히 내릴것이다.


 
 

 
Total 8
번호 제   목 글쓴이 날짜 조회
8 연변문학 2017년 2호 추천작품-맑은 아침의 명상(김의천) 작가협회 03-16 3036
7 연변문학 2017년 2호 추천작품-내가 지금 그리운것은…(리정림) 작가협회 03-16 3105
6 연변문학 2017년 2호 추천작품-교또에서 만난 윤동주(김호웅) 작가협회 03-16 5302
5 연변문학 2017년 1호 추천작품-연변인민의 메뉴(소려(邵丽… 작가협회 02-24 2874
4 연변문학 2017년 1호 추천작품-연변의 “조화로움”과 “아름다… 작가협회 02-24 2712
3 연변문학 2017년 1호 추천작품-연변엔 민혁이와의 사연이 있다(… 작가협회 02-24 2415
2 연변문학 2017년 1호 추천작품-마음을 담아 저 맑은 별을 노래하… 작가협회 02-24 2343
1 “화림문학상"수상작품-별에서 온 그대(리은실) 작가협회 01-25 4049
 
 
and or

Copyright © 2009 延邊作家協會 all rights reserved

地址: 吉林省延吉市公園路000號 郵編: 133000 吉ICP備1200596號
Tel: 0433-2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