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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작가넷 > 문화카페 > 수상작품 > "화림문학상"수상작품-소설 바람의 뜰(박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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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1-25 16:49
"화림문학상"수상작품-소설 바람의 뜰(박은희)
 글쓴이 : 작가협회
조회 : 5,689  



바람의 뜰

박은희


바람 1



녀자는 바람을 등지고 이미 몇시간째 굳어버린듯이 서있다. 그녀 앞에는 작은 화판이 놓

여있다. 등 뒤에서 아무 색채도 싣지 않은 투명한 바람이 불어온다. 남자가 조용히 옆에

다가섰다. 인기척에도 녀자는 미동을 하지 않았다.


“그림은 잘 되여가요?”


그제야 녀자는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녀자의 눈에는 희열 비슷한것이 아른거리고있

었다.


“네. 완성했어요.”


남자는 그녀 앞에 놓인 화판을 바라보았다. 역시 새하얀 백지로 남아있다.


“다 그린거예요?”


녀자의 얼굴은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했다. 그 우로 시럽같은 달콤한 친밀감이 배인 미소

가 수줍게 남실거렸다.


“주제가 뭐죠?”


남자는 차마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할수 없었다.


“바람, 봄에 불어오는 겨울바람이에요. 화사하죠.”


녀자의 얼굴은 어린 아이처럼 해맑고 순수했다. 남자는 녀자에게서 바람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싱그럽진 않지만 따뜻했다.




바람 2


P병원는 번화한 시가지에서 한시간 가량 차를 타면 도착할수 있는 한적한 교외에 자리

잡고있다. 구에서 세운 이 병원은 환자의 치료보호시설과 료양원을 두루 갖춘 전문병원

으로 근방에서 꽤 유명했다. 조금은 가파로운 언덕길을 올라 야트막한 산기슭의 숲 언저

리에 있는지라 늘 한가하고 조용했다. 남자가 근무하는 정신신경과는 외관도 병실안도

모두 초록빛으로 되여 있는 낡은 이층 병동에 위치해 있다. 잎이 무성한 나무들에 둘러

싸여 건물은 바깥세상과 차단된 느낌을 주고있다. 병동을 에돌아 한참 걷다 보면 넓은

잔디밭이 나타난다. 꼼꼼하게 잘 다듬어진 반반한 잔디밭은 주위에 가시 달린 탱자나무

가 울을 두르고있어 한결 갑갑하고 쓸쓸한 기운이 감돌고있었다. 그나마 마디마디 손톱

만한 노랑꽃들이 피여오른 넝쿨이 여기저기 뻗어있어 황량하면서도 아름다운 마당을 연

출하고있다. 한켠에는 지난해 무져놓은듯한 잘린 통나무 더미가 녹슨듯 짙은 붉은빛을

흘리며 쌓여있었다.


녀자는 어느날 갑자기 홀로 이 병원에 찾아왔다. 보호자 없이 입원을 요구하는 환자는

처음이다. 그리고 녀자처럼 멀쩡해 보이는 환자도 처음이였다. 말씨도 차분하고 행동도

조심스러웠으며 눈빛도 맑고 또렷했다. 그럼에도 그녀를 받아준건 그녀의 화판 때문이

였다. 돌아가라고 권하는 남자에게 녀자는 자신의 그림이라며 화판을 내밀었다. 새하얀

종이에는 아무것도 그려있지 않았다. 그런데 녀자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림에 대해 열

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는 겨울 바람을 그린거예요. 손을 대보세요. 따스해요. 신기하죠? 겨울 바람은 사실

아주 따뜻해요.”


남자는 녀자에게 이층병실을 안내했다.


녀자는 매일 치료받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뒤뜰에 나가 화판을 펼쳐놓고있었다. 그녀는

가끔 환성을 지르기도 하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면서 자신의 작품에 감동했다. 또한 두

팔을 힘껏 뻗은채 눈을 감아보기도 했고 때로는 누가 간지럽히기라도 하듯 허리를 배배

꼬며 깔깔 웃어대기도 했다.


어느 하루 녀자는 마당 한귀퉁이에 서있는 왜소한 나무를 가리키며 남자에게 물어왔다.


“뭐가 보이세요?”


“나무요.”


“그리고 또 뭐가 보이세요?”


남자는 한참이나 나무를 쳐다보았다. 그냥 나무만 보였다.


“또 뭐가 있죠?”


녀자가 속삭이듯 말했다.


“바람이요. 나무만 보니깐 바람이 보이지 않는거예요.”


남자는 다시 나무를 바라보았다. 다른 나무들에 비해 유난히 작고 푸른 가지가 바람에

하늘하늘 나부끼는 깃발처럼 휘청대고있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것만 볼려고 해요.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것이 훨씬 더 많거든

요.”


녀자는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남자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남자는 웬지 두려

웠다. 자신의 얼굴에서 녀자는 무언가 보아낼것만 같았다. 녀자는 예상된 반응이라는듯

그러는 남자를 보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가볍게 웃었다.


남자는 수많은 환자들을 겪어왔지만 녀자만큼 어려운 과제는 처음이였다. 화판을 멀리

한 녀자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였다. 이틀에 한번씩 진행되는 심리상담에서 남자는

녀자의 병세를 끄집어내기는커녕 그녀의 이상한 론리에 서서히 빠져들어가고있었다. 남

자는 그것이 두렵고 황당했다. 그러면서 알수 없는 무언가를 기대하고있었다.


남자는 그녀의 화판에서부터 진단을 시작하려고 했다.


“언제부터 그림을 그렸어요?”


“언제부터 바람을 그렸어요라고 묻는거죠? ”


“언제부터 바람을 그렸어요?”


“언제부터 보이지 않는걸 그렸어요라는 질문이 되겠네요.”


남자는 흠칫했다. 당황했지만 그보다 사실은 더 많이 두려웠다.


“언제부터 보이지 않는걸 그렸어요?”


“그건 또 언제부터 많은것이 보이기 시작했어요라는 질문이 되네요.”


“…”


“선생님은 저의 병명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


“환각, 환시 아니면 망상이라고 생각하나요?”


남자는 둔중한 무기로 머리를 얻어맞은듯한 어지러움을 느끼며 일어섰다. 심한 현기증

이 났다. 몇년전 정신분열증이 현대의학의 한계가 드러날수밖에 없는 질병원인론의 한

계라고 여지없이 지탄을 하던 젊은 실습생이 떠올랐다. 그때에도 남자는 이렇게 현기증

을 느꼈었다. 그가 치료해온 수많은 환자들은 마음의 건강을 찾고 이 병원을 떠났다. 그

들은 과연 진정한 건강을 찾은것이었던가.


남자는 빈혈기를 참으며 겨우 연구실로 돌아왔다. 환각이라, 망상이라 익숙한 그 낱말들

이 이렇게 생소하기는 처음이였다. 환자의 기록차트를 들고 남자는 한참을 망설이였다.

녀자의 병명에 뭐라고 적어야 할지 남자는 고민하지 않을수 없었다.


녀자가 병원에 들어온 후 환자들은 자주 뒤뜰에 모여 그녀의 그림을 감상하군 했다. 그

녀는 자신의 화폭을 한장씩 넘기며 진지하고도 상세하게 바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건 아침이슬을 머금은 바람이에요. 근데 너무 야위였어요. 야위여서 슬픈 바람이었어

요. ”


녀자는 백지를 가리키며 서글프게 말했다. 그리고 화폭을 한장 뒤로 넘긴다.


“이는 길 잃은 바람이구요. 내가 그림을 다 그릴 때까지 저 동녘끝에서 서성이고있었어

요. 이제는 집을 찾았을려나. 아니면 집 같은건 필요없다고 지금쯤 생각할지도 모르죠. ”


녀자의 손이 또 한장을 넘긴다.


“아, 이건 작은 돌맹이에 깔린 바람을 구해준거예요. 무척 고마워했었죠. 고마워해서 내

가 미안했었죠. 가끔은 틈새에 끼여있는것이 행운스러운 일일지도 모르는데…”


백지는 그렇게 한장한장 넘어가고있다. 가끔씩 야 하는 환호성이 들리기도 하고 박수소

리도 간간히 들려온다. 환자들은 녀자의 화판을 둘러싸고 그렇게 서있었다. 머리를 끄덕

이며 웃음짓는 사람도 그녀처럼 두 팔을 벌려 바람을 안아보는 사람도 지어는 북받혀오

르는 감정에 소리내여 슬피 우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에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던 남자에게도 사실 얼마전부터 아

주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고있었다. 남자의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걸려오고난 후이니깐

거의 한주일전이라 보아진다. 그날 저녁 안해는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시어머니의 목소

리를 알아듣고는 얼굴색이 금세 시뿌둥하게 변하더니 쾅 소리나게 안방문을 닫아버렸

다. 남자는 침착하게 담배에 불을 붙여물었다. 아버지의 제사가 열흘후임을 남자는 언녕

알고있었다. 어머니는 뭐가 미안한지 자꾸 미안하다고 하면서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남자는 마지막 남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당기였다. 그는 안해

가 방문을 열어주기를, 문을 열고 다소 호들갑이라도 떨면서 말을 먼저 건네주기를 바랐

다. 남자는 화가 나거나 서운하거나 서러움이 북받치기에 충분한 상황임에도 이상하게

외로워났다. 긴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남자는 안해에 대한 기대를 접은지도 긴 세월이 흘

렀다는것을 기억해냈다. 그러면서 그는 외로움이란 익숙하면서도 아주 낯선것임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 일이 있고나서 남자는 꿈속에서 녀자를 자주 보았다. 그리고 그동안 녀자한테 기대해


온것이 무엇이였는지 알게 되였다. 그러나 이상한것은 단 한번도 녀자의 얼굴을 본적이


없다는것이다. 그럼에도 남자는 녀자임을 알아차렸다. 냄새, 녀자에게서 나는 특유의 바


람 냄새를 남자는 맡을수 있었다. 그리고 남자에게도 바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녀자는 잠자리 날개같은 얇은 옷을 입고 남자의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바람을 보여주겠


다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녀자의 춤사위는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절주도 맞지 않았으


며 서투르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녀자의 엉성한 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있었다.


녀자의 춤사위에는 그녀의 깊고 까아만 눈동자처럼 남자를 강렬히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들어있었다. 그것은 말로 형용할수 없을만큼 짜릿하고 묵직하고 감격스러운것이였다.

녀자의 손목이 힘차게 아래로 꺾이운다. 다시 우로 탁 쳐올라가면서 어깨가 들썩인다.

신나게 들썩이던 어깨가 아래로 축 처지면서 한쪽 다리가 허공을 빙빙 돌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뒤짐을 지고 절룩거린다. 왼발을 먼저 절룩거렸다가 오른발을 다시 절룩인다.

그러다가 두발을 같이 절룩거린다. 조곤조곤 무언가를 차근차근 밟아나가듯이 녀자는

그렇게 뒤짐을 지고 마당을 빙빙 돌고있었다.


그럼에도 녀자의 주의를 맴도는 바람은 너무나 다채롭고 화사했다. 그속에서 남자는 녀

자와 은밀한 사랑을 나누었고 때로는 그 사랑에 목이 메여 울기도 했다.


붉고 푸른 빛깔이 나는 젊은 시절의 열정이 바람속에서 다가왔다. 남자와 녀자는 손을

잡고 포옹하고 가볍게 입맞춤을 하였다. 녀자는 따스한 바람결 같은 손으로 남자의 몸을

어루만져주었다. 옅은 무지개의 한자락 같은 바람이 주변을 감돌면서 그들은 서로의 몸

을 탐하기 시작했다. 사십년 가까이 한번도 경험해 본적이 없는 가슴 터질듯한 희열이

몸속 어디선가 조용히 흘러나와 자신의 손끝에 고이는것을 남자는 느꼈다. 녀자의 몸은

형용할수 없을만큼 부드러웠다. 작고 푸른 꽃잎 같은 바람이 나비 날개처럼 피여날린다.

녀자는 허물을 벗듯 옷을 한겹한겹 내려놓는다. 연한 초록빛의 원초적인 본능 같은것이

연상되면서 남자는 매끄럽고 해말간 녀자의 몸에서 숭고함마저 느꼈다. 톡톡 터질것만

같은 자주의 꽃망울이 그녀의 가슴에 달려있었다. 남자는 그 망울에 떨리는 입술을 조심

스레 갖다댄다. 녀자는 이슬처럼 투명한 시선으로 가슴에 안긴 남자를 애틋하게 바라보

고있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듯한 그러나 모든것이 담겨져있는 눈빛이였다. 이때 노랑

과 파랑으로 그려낸 찬란한 한낮의 해살이 담긴 바람이 불어온다. 남자의 입술은 이번에

는 녀자의 동그란 배꼽을 탐닉했다. 황금빛 물결이 찰랑이는 논이 펼쳐졌다. 그 논을 지

나 납작납작한 초가집들 틈에서 주황색으로 반쯤 익은 탐스러운 고추밭이 보였다. 남자

는 자신의 아래도리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어느새 연보랏빛 바람이 물들여져 있었

다. 녀자는 남자를 일으켜 입술을 살며시 포갰다. 남자는 왈칵 눈물을 내쏟았다. 녀자한

테서 가을 냄새가 났다. 싱그럽진 않지만 따뜻했다. 남자는 흐느끼면서 이 세상을 벗어

난듯한 황홀함에 젖어버렸다.


꿈에서 깨어난 남자의 몸은 땀에 흥건히 젖어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가슴은 몹시 뛰

였다. 남자는 옆에 잠들어있는 안해를 바라보았다. 아침이어서 그런지 안해의 두터운 눈

두덩은 눈을 아예 덮어버렸다. 녀자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꿈속에서처럼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녀자의 냄새만 불어올 뿐이다.

따뜻한 아침이였다.


남자는 아침밥을 먹는둥 마는둥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누가 기다리고있기라도 하듯

초록빛으로 물들여진 숲을 지나 씨엉씨엉 언덕길을 올라왔다. 그날도 녀자는 병실에 없

었다. 남자는 곧추 뒤뜰로 내려갔다. 눈에 익은 새하얀 화판이 보이고 바람처럼 펄럭이

는 환자복이 보였다. 남자는 괜스레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머

뭇머뭇 녀자 옆으로 다가갔다.


“오셨어요?”


녀자는 돌아보지도 않은채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왔다.


“어떻게 아셨어요?”


남자는 고맙고 기뻤다.


“냄새요.”


남자는 어젯밤 꿈이 혹시 꿈이 아니었나 잠깐 의심되였다.


“맞아요. 그건 꿈이 아닐지도 모르죠.”


녀자는 붓을 놓고 조용히 돌아섰다.


녀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있는 남자에게 수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남자는 녀자


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해빛이 너무 강렬해서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노랗고 하얗고 빠


알간 동그란 점들만이 바람을 타고 둥둥 떠있었다. 눈이 아프도록 부시였다.


바람 3


남자와 안해의 침묵은 꽤 오래 갔다. 그리고 남자는 이번 해에도 혼자 고향에 내려갔다.

어머니도 왜 같이 오지 않았냐 묻지 않았다. 오지 않는것이 당연하듯 그렇게 남자와 어

머니는 조촐하고도 조용하게 아버지 제사를 치르고 남자는 자신의 냄새가 아직도 짙게

배여있는 방에 들어갔다. 어머니가 미리 치워놓은듯 방안은 정연했고 깨끗했다.


창문을 열어보았다. 상쾌한 바람이 솨솨 불어오자 남자는 문득 녀자가 보고싶어졌다. 기

다려줄 누군가가 있다는것이 그것이 혹여 꿈이라 할지라도 쓸쓸하고 허무한 밤의 고독

을 씹어삼키기에는 아주 큰 위안이 되여주었다. 남자는 어머니 몰래 제사상에 올리다 남

은 소주를 가져다 잔에 그득히 부어 단숨에 들이마셨다. 술맛은 쓰고 슴슴하고 달고 독

했다. 그는 다시 잔을 가득히 채워 련거퍼 들이켰다. 담배생각이 간절했다. 서랍 어디엔

가 피다 남은 꽁초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남자는 여기저기 뒤지다가 말라빠진 담배꽁초

를 발견했다. 어머니는 그의 물건이라면 어느 하나라도 버리지 않을것이다. 남자는 그것

에 불을 붙였다. 어머니방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처럼 희미한 담배연기가 그를 부드럽게

감싼다. 그러다가 술기운이 달아오르는지 그는 이내 잠이 들어버렸다.


꿈속에서 남자는 새하얀 뭉게구름을 타고 다니는 아버지를 만나기도 하고 해빛 아래서

봄바람을 만지작거리는 녀자를 보기도 했다. 녀자는 그림 한폭을 그에게 선물했다. 그리

고 귀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난 미치지 않았어요. 마음이 조금 더 열렸을 뿐이에요. 남자

가 꿈에서 깨여나 보니 어머니가 그의 귀불을 조심스레 만지다가 흠칫 놀라며 돌아앉았

다. 밤새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어머니와 마주앉아 아침밥을 먹으면서 남자는 녀자를 떠

올렸다.


바람 4


바람이 불어온다. 아무 색채도 싣지 않는 투명한 바람이 불어온다.


녀자는 아침 일찍 뒤뜰에 나가 화판을 펼쳐놓았다. 언제나와 같이 환자복들이 녀자를 둘

러쌌다. 녀자는 손으로 화판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붓을 조용히 들었다. 녀자의

붓끝이 하늘에 머물렀다. 새하얀 구름과 파아란 하늘이 녀자의 머리우에 떠있다. 녀자의

붓끝은 구름을 가르고 하늘을 가른다.


붓끝은 힘차게 움직인다. 붓끝에는 하늘이 물들어있다. 그리고 구름이 물들어있다.


붓끝은 화판우에서 힘차게 춤추고있다. 녀자의 가녀린 손목에 파란 힘줄이 발딱 일어섰

다. 붓은 백지우에서 또 하나의 바람을 그리고있다. 하늘을 머금은 그리고 구름을 머금

은 바람이 투명하게 그려지고있다. 붓끝은 시간을 역류하며 소용돌이치고있다. 환자복

들의 환호성이 터져올랐다. 이윽고 녀자는 붓을 조용히 놓고 돌아섰다. 그리고 남자옆에

조심스레 다가섰다.


“보이나요? ”


화판에는 아무것도 그려져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속에 어쩌면 많은것이 담겨져있을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잠깐 생각했다.


“안보이나요? ”


화판을 타고 여러갈래의 시간들이 주르르 흘러내리고있다. 바람은 항상 여러겹으로 겹

쳐져있었다.


“투명한것이 사실은 가장 다채롭거든요. ”


남자는 녀자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언제나와 같이 깊고 맑았다. 그리고 오늘따라 강렬

한 무언가가 내비치고있었다.


한 여름날의 날씨는 참으로 변덕스럽다. 맑게 개였던 하늘이 휘뿌옇게 흐려지더니 제법

굵은 비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지고있다. 환자복들이 와 소리치면서 병실로 뛰여들어간

다. 남자도 이층 병실까지 한달음에 뛰여왔다. 아주 잠간사이지만 의사복은 얼룩덜룩 비

에 젖어있었다.


비는 어느새 시원스레 내리붓고있었다. 문득 남자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녀자의

병실로 향했다. 그러나 텅 비여있다. 남자는 다시 허둥지둥 뒤뜰로 뛰여갔다. 비 사이로

화판이 보이고 그 앞에 쪼크리고 앉은 작은 몸뚱이가 보였다. 남자는 허겁지겁 달려갔

다. 가냘픈 몸매의 환자복은 이미 비에 폭삭 젖혀버려 더욱 볼품없게 되였다. 남자는 녀

자를 잡아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 작은 몸체에서 나오는 강렬한 힘과 거부할수 없는

이끌림에 남자는 되려 녀자옆에 털썩 주저앉고말았다.


“뭐해요? 얼른 일어나! ”


남자는 녀자를 다시 잡아일으켰다. 그러나 녀자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작

고 야윈 몸매에서 놀랍도록 큰 힘이 힘차게 역동하고있었다. 남자는 자신이 그토록 두려

워하던 그것이 스멀스멀 가까워오고있음을 아프게 느끼고있었다.


“어서 일어나요. ”


남자는 꽉 잠긴 목소리로 녀자를 다시 잡았다. 이때였다. 녀자는 몸을 춰세워 무릎걸음

으로 화판앞에 바짝 다가갔다. 그러더니 화판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바람이… 바람이 비에 젖어버렸어요.”


녀자는 울먹이고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 녀자는 홱하고 남자에게로 머리를 돌렸

다.


녀자의 눈동자는 굳어져있었다. 그리고 야릇한 웃음기가 입가에 피어올랐다. 으흐흐

흐… 녀자의 웃음소리였다.


이히히히… 이것도 녀자의 웃음소리였다.


녀자는 달라지고있었다. 혹은 이제야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있을지도 모른다. 녀자

는 이상야릇한 웃음을 실실 흘리고있다. 엉금엉금 그녀는 무릎걸음으로 남자앞에 다가

왔다. 녀자의 굳어져버린 눈동자는 깊은 수렁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녀자는 얼굴을

남자한테 바싹 들이밀었다. 녀자의 수렁에 남자는 그대로 빠져드는것만 같았다.


녀자의 웃음기가 순간 확 사라진다. 그녀의 얼굴에는 눈동자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남자

는 넋을 잃고 그녀의 눈동자안에 빨려들어가고있었다.


이때 남자는 악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녀자의 눈동자가 힘차게 역류하고있다. 굳어져

버린듯한 그 새까만 눈동자속에서 대지와 하늘이 서로 부둥켜안고 소용돌이치고있었다.

그속에서 바람은 휘이휘이 울부짖고 구름은 온몸으로 비명을 내지르고있다. 먼지가 뽀

얗게 날린다. 대지와 하늘은 한몸뚱이가 되여있다. 어느것이 하늘이고 어느것이 대지인

지 분간할수 없을만큼 하나로 되여 깊은 수렁속으로 빠져들어가고있다.


정지된 공간이 역동하고있다. 새까만 밤을 안고 쉼없이 힘차게 움직이고있다.


남자는 가슴을 부둥켜안고 뒤걸음질쳤다. 그는 녀자한테서 느꼈던 그 당혹감과 기대감

이 무엇이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남자는 앉은걸음으로 자꾸만 뒤로 물러났다. 그는 가

슴이 터질것만 같았다. 잡히지 않는 시간만큼 머물수 없는 공간만큼 녀자는 멀어져갔다.

또다시 가슴이 터질것만 같았다.


그칠것만 같지 않는 매정한 비바람이 대지를 휘이휘이 쓸어담는다.


바람 5


비는 한풀 꺾이운 듯 줄금줄금 시름없이 내리고있다. 흐린 하늘 어딘가 아득히 먼 곳에

서 엇비듬히 해빛이 비쳐드는듯 했으나 비는 시원스레 개이지 않았다.


녀자가 조용히 일어섰다. 그러더니 춤을 추기 시작했다. 꿈속에서처럼 녀자의 춤은 엉성

하기 그지없었다. 팔과 다리는 제멋대로 움직이고 몸은 뻣뻣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녀

자는 힘차게 팔을 내저으며 너울거린다. 폴싹 녀자의 몸이 땅에 그대로 주저앉는다. 원

체 작은 몸체가 땅속에 잦아들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죽은듯이 나동그라졌던

몸체가 다시 꿈틀거린다. 오른쪽 어깨가 움찔하더니 왼쪽 어깨가 덩달아 움찔거린다. 이

번에는 서투른 어깨춤이 시작되였다. 그녀는 슬쩍슬쩍 어깨를 들썩이며 다시 일어선다.

그리고 뒤짐을 쥐고 화판을 빙빙 돌기 시작한다. 춤사위는 보잘것 없지만 힘차고 묵직하


다.


이층 병동에서 새하얀 의사복 몇몇이 달려나온다. 그들은 그때까지도 어깨춤을 들썩이

는 가냘픈 환자복과 멍하니 주저앉아있는 넋이 나간 껑충한 의사복을 부축하여 들어온

다. 환자복은 들릴락 말릴락 한 목소리로 흥얼거리고있었다. 노래같기도 하고 푸념같기

도 하고 탄식같기도 한 알수 없는 가락을 그렇게 주절거리고있었다.


비는 그렇게 찔금찔금거리며 지루한 오후를 만들어가고있다.


바람 6


이년에 한번씩 진행되는 정신병리학 학술회의가 이번 해에도 P병원에서 열리였다. 남자

가 일찍 제기했던 체질개선 정신요법이 회의의 제일 첫 의제였다. 이는 그가 최근 몇년

간 제출했던 보고서를 밑바탕으로 한 과제로서 이미 의학계에서는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이였다. 남자의 권위와 경험으로 보나 론문의 내용으로 보나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통과되여야 할 형식적인 과제라고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고있는

그 찰나 누군가 조용히 일어섰다. 얼굴이 약간 상기된 남자였다.


“이번 과제는 취소해주시기 바랍니다.”


회의장이 웅성웅성 들끓기 시작했다. 의아함이 어린 눈길들이 남자의 얼굴에 이러저리

꽂혔다. 맞은 켠에 앉아있던 원장만이 느긋하고 미묘한 웃음을 띄우고 남자를 의미심장

하게 지켜보았다.


“근본적인 착오를 극복하지 못한 제의서입니다. 다시 검토해보겠습니다. 이번 회의에서

는 취소해주십시오.”


남자는 여기저기에서 날아오는 따가운 눈초리를 의식하며 자리에 앉았다. 겸손을 떠는

것은 물론 잘난척 하는 행동은 더더욱 아니건만 사람들의 아니꼬운 시선은 쉽게 가라앉

지 않았다. 어험, 붉으락푸르락 얼굴색을 여러가지로 구기며 원장이 헛기침을 크게 지었

다. 이때 건너편에 앉아있던 나이 지긋한 구레나룻이 손을 들었다.


“너무 겸허하시군요. 그러면 한번 들어나 봅시다. 이렇게 완벽한 과제의 기본 착류가 대

체 무엇입니까?”


확연히 비꼬는 어투임에도 남자에게는 반가운 질문이였다.


“제가 제출한 론문에는 장애행동과 단순한 개인특이적 행동을 구분하는 기준이 아주 애

매모호합니다. 그리고 장기적인 약물복용은 중독증상을 일으킬 우려가 매우 높습니다.

이는 환자가 완치된듯 보이지만 사실상 더욱 큰 그리고 새로운 외상성 신경증을 앓을 가

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아직 의학으로는 해명하지 못할 아니 어쩌면 해명할수가 없

는 다른 경우도 배제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회의장이 침묵에 빠져드는 경우는 두가지가 있다. 어처구니 없는 발언이 튀여나왔을 때

와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의견이 나타났을 때. 주변의 뜨악한 시선에도 남자는 말을 이

었다.


“아직은 그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한 상황에서 그대로 제출할수는 없습니다.”


안절부절 못하던 원장의 얼굴이 점점 무섭게 일그러져갔다. 남자의 인사치레 정도로 생

각했던 그의 오산이 크게 빗나가는 순간 자신의 령역을 침범당한듯한 적의와 배신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럼에도 남자의 태도는 강경했고 진지했다. 이번 과제가 취소됨에

따라 P병원에 내려오기로 한 막대한 연구보조비가 물 건너가게 된다는것쯤은 남자도 잘

알고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더이상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을 덮어감출수 없게 되였다.


그날 저녁 P병원 원장실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남자는 한동안 근신하기로 마

음먹었다. 그러나 학술회의 파동이 채 가라앉기도전에 남자를 둘러싼 또 다른 소문이 나

돌기 시작했다.


남자는 친하게 지내오던 후배한테서 그 얘기를 처음 들었다. 후배는 장황하게 소문의 내

막을 늘여놓고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여 미안하다고 한마디 덧붙혔다. 그리고는 남

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뭔가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만약 그때 남자가 후배의 예

상대로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길이길이 날뛰였다면 소문은 그대로 주저앉아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자는 아무말 없이 조용히 그 자리를 떴다. 후배의 실망을 넘어선 어처

구니 없는 눈길이 뒤를 따랐다.


며칠 지나서 P병원은 물론 학계까지 소문은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최고의 실력을 자랑

하는 정신과의사와 환각증세를 보이는 녀자의 사랑이야기, 불륜이라는 사실보다 이들의

신분이 더욱 화제거리였다. 자그마한 시가지에서 이보다 더 황당하고 자극적인 스캔들

이 있어본적 없다고 입 가진 사람마다 떠들어댔다. 그러나 남자는 그 이야기만 나오면

아무말 없이 조용히 그 자리를 피했다. 이는 소문에 날개를 달아준셈이 되였다.


그러던 어느 하루 머리 우로 쏟아질듯 가까이 출렁대는 푸른 숲을 지나 병원 언덕길로

한 녀자가 허둥지둥 올라왔다. 가녀린 몸매에 비하여 얼굴은 조금 통통한듯싶은 녀인은

심한 곱슬머리를 뒤로 묶고있었다. 대문에 들어서자 숨을 고를 틈도 없이 곧장 이층 병

동으로 향하는 품이 이 곳이 낯설지만은 않은듯싶다. 잠시후 녀인은 다시 마당으로 나와

병동 뒤를 돌아갔다. 조용하던 뒤뜰이 삽시에 소란스러워졌다. 누군가 팩팩거리며 악을

쓰고있었고 거기에 머리채를 잡히운듯한 새하얀 환자복이 이러저리 끌려다녔다. 주위에

서 뜯어말리느라 요란을 떨었지만 누구도 녀인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는듯 하다. 환자복

은 허수아비처럼 녀인의 손에 이끌려 이쪽저쪽 넘어지고 뒹굴더니 보기에도 딱하게 패

대기쳐져있었다. 이때 누군가 그 사이로 성난 범처럼 뛰여들었다. 새하얗게 질린 남자였

다.


“당신 뭐 하는 짓이야!”


곱슬머리가 이번에는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기운이 다 빠진듯 손만 허우적거리

다가 그대로 땅에 털썩 주저앉는다. 다시 일어서려고 녀인은 땅을 짚고 안간힘을 써댔

다. 몇번 그러기를 반복하더니 곱슬머리는 아예 땅에 잦아들것만 같이 폴싹 누그러지고

말았다.


바로 그때였다. 초라하게 찢겨진 옷에 산발이 된 녀자가 곱슬머리 옆으로 조심조심 다가

갔다. 그러더니 녀인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화들짝 놀란 녀인은 녀자를 사정없이 밀쳐

냈다. 녀자의 갸냘픈 몸이 그대로 힘없이 땅에 나동그라진다. 순간 남자는 울컥 했다. 그

러나 녀자는 다시 몸을 춰세워 이번엔 무릎걸음으로 조심스레 기어갔다. 곱슬머리 옆에

바짝 다가간 그녀는 녀인의 손을 꼭 찾아쥐었다. 녀자의 손은 언제나 그랬듯이 따뜻했

다. 조금은 당황한 듯 두려운 듯 곱슬머리는 꼼짝 않고 녀자를 쳐다보았다. 녀자는 녀인

을 꼭 껴안아주면서 혼자말인듯 속삭였다.


“언니에게 그림을 그려줄게요.”


경직된 녀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것을 남자는 보았다.


“어제밤 꿈에 찢겨진 바람이 찾아왔었어요. 근데 슬프지 않아보였어요. 찢겨진 바람이

자유로울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녀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미친 년, 미친 놈.”


녀인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제일 나빠…”


휘청휘청 언덕길을 지나 울창한 숲에 점점 가리어지는 녀인의 뒤모습을 남자는 안타깝

게 지켜보았다. 바람에 서글프게 날리는 녀자의 찢어진 옷자락 만큼이나 녀인의 모습은

웬지 애달파 보였다.


바람 7


그날 저녁 남자는 늦은 시간까지 진찰실에서 서성거렸다. 지나치게 초연해서 더 불안한

녀자의 모습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누가 뭐라 해도 남자에게 녀자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였다.


핸드폰 소리가 징징 울렸다.


“자네 어딘가?”


낮지만 묵직한 장인의 목소리였다. 예상했던 일이다.


“병원입니다.”


“그쪽으로 가는 길이니깐 잠간 나오게.”


긴 세월 어두운 방구석에 처박아두었던 낡은 일기장을 꺼내든 심정으로 남자는 한동안

앉아있었다. 그래서 불안하지만 설레였다. 그리고 두렵지만 뭔가가 기대되는 짜릿함에

몸서리를 쳤다. 이윽고 남자는 녀자의 병실로 향했다. 어느새 머리를 곱게 빗고 옷매무

시도 단정히 한 녀자가 벽을 마주하고 그린듯이 앉아있었다.


남자는 병원을 나섰다. 육중한 대문을 밀고 나오자 언덕 아래까지 길을 따라 심녹색 숲

이 울창하게 펼쳐져있다. 등 뒤에서 서늘한 바람이 분다. 남자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 나

무숲을 들여다보았다. 저녁무렵의 바람은 하늘하늘 팔랑거리는 몸매를 숨기며 숲속으로

종종걸음친다. 남자는 숲이 끝나는 곳에서 왼쪽으로 돌아섰다. 상점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작은 거리가 나타나고 그 입구에 남자가 자주 가는 낡은 카페가 웅크리고있다.


거리를 향해 나 있는 남쪽 창가에 이미 장인이 앉아있었다. 테이블까지 열발자국도 안되

는 거리지만 남자는 여러번 숨을 몰아쉬면서 천천히 걸어갔다. 그에게는 용기가 엄청 필

요되는 일이였다.


침묵이 흘렀다. 침묵은 언제나 독설보다 공포스러운 법이다. 장인은 질문을 삼키고 남자

는 대답을 삼킨다. 어느새 창가에는 짙은 어둠이 시름겹게 걸터앉았다. 하늘에는 희뿌연

달이 표정없는 얼굴을 하고 졸고있었다.


“술 한잔 하겠나?”


장인의 목소리는 낮고 착잡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그럼 차로 하지.”


남자는 뭔가 석연치 않은 이 느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망설여졌다. 장인은 달라있

었다. 그러나 달라진것은 장인뿐이 아니였다.


“얘기 들었네. 그러나 유진이가 그냥 소문이라니 나도 그리 믿겠네.”


남자는 앞에 놓인 컵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나 더욱 갈증이 났다.


“자넬 믿겠네. ”


미세하지만 장인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남자는 이상하게 화가 났다. 험상궂어 보이기

까지 하던 장인의 위엄스런 모습이 갑자기 사라진것에 남자는 무척 화가 나있었다. 그러

면서 불끈 치솟는 무언가가 있었다.


“소문이 아닙니다. ”


남자는 내뱉듯이 또박또박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장인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옅은 기

미가 듬성듬성 내보이는 축 처진 눈꺼풀이 푸르르 떨렸다. 장인어른은 위세등등했지만

안해의 아버지는 초라하고 연약했다. 끄응 묵직한 신음소리를 내며 장인은 힘겹게 눈을

떴다. 그러더니 떨리는 손으로 차잔을 움켜쥐였다.


장인은 말을 고르듯 잠시 머뭇거렸다.


“유진이가 애를 낳지 못해서 이러는건가? ”


“아닙니다.”


저 그렇게 비렬한 놈 아닙니다. 남자는 웨치고싶었다.


“안사돈 때문인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그랬듯 어머니는 바라는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남자는 고래고래 소리지르고싶

었다.


“그럼 병원때문인가. 언젠가는 내줄 생각이라는걸 자네가 더 잘 알고있지 않는가.”


남자는 머리가 어지러워났다.


“대체 뭔가. 그 정신나간 녀자보다 우리 유진이가 못한게 뭔가.”


문득 남자의 눈앞에는 바람에 흔들리던 작고 여린 나무가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새하얀

환자복이 그 옆에서 나붓기고있었다. 남자는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그 녀자는 바람을 그릴줄 압니다. ”


장인은 멍한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녀자가 안해를 껴안아주었을 때 굳어버렸던

안해의 표정을 남자는 다시금 볼수 있었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을 짚고 일어섰다. 부축하려는 남자

를 가볍게 밀쳐내고 장인은 꿈속을 걸어가듯 회창거리는 몸을 이끌면서 카페문을 나섰

다. 앙상한 가로수 밑에 휘우듬히 기대여 있는 장인의 지친 듯한 모습이 창문으로 보였

다. 남자는 처음으로 안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 8


한낮을 바라보는 해살 뜨거운 어느 하루의 오후였다.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새파랗고

높기만 했다. 대지는 여름기운에 몸서리치지만 하늘은 서늘한 가을빛을 띠고있다. 모든

것은 이처럼 부조화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있는듯싶다. 쉬엄쉬엄 눈에 띄던 성냥개비 같

은 집들이 점점 멀어지고 연한 수박빛 물결이 출렁이는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하얀

색 승용차 한대가 노란색의 표지판을 따라 검정색의 아스팔트 위를 신나게 질주하고있

다. 운전석옆에는 화판을 꼭 껴안은 녀자가 눈을 지긋이 감고 앉아있다. 희고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낸 남자는 녀자의 얼굴을 연신 바라보면서 무척이나 흐뭇해하고있었다. 남

자는 차를 빠르게 몰아 들판을 지나고 고개를 넘어 바다로 달려가고있다. 바다는 파아란

유리로 만들어진듯 멀리서도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그렇게 바다를 끼고 구불구불 휘어

진 해안길을 한참 내달리던 차는 드디어 한 곳에 멈춰섰다.


남자와 녀자는 손을 꼭 잡고 바다를 향해 걸었다. 녀자는 뒤꿈치를 들고 모래우를 사뿐

사뿐 걷고있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웃었다.


“내가 그린 그림들, 그냥 새하얀 백지였잖아요.”


남자는 처음 녀자를 만났을 때의 당혹감에 흠칫 했다.


“백지 맞아요. ”


녀자는 남자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힘껏 해빛속으로 뻗어올렸다. 남자는 눈을 꼭 감

았다. 한올 두올 그리고 세올 바람줄기가 한겹한겹 남자의 얼굴우로 겹쳐진다. 바람은

형용할수 없을만큼 부드러웠다. 그리고 따스했다. 더우기는 포근했다.


남자의 머리결이 가볍게 날린다. 남자는 더욱 고개를 쳐들었다. 눈이 따가워났다. 그러

나 그 순간 남자는 오색찬란한 바람을 볼수 있었다. 꿈속에서 보였던 색채의 선명함을

뛰여넘는 빛깔에 남자는 가느다란 비명을 질렀다. 빨간 빛줄기가 아득하게 먼 저쪽편에

서 너울거린다. 그것은 남자가 언젠가 가졌던 정열과 순수함이였다.


그속에서 한 소년이 걸어온다. 마음의 병을 앓고있는 어머니와 단둘이 집을 나서며 소년

은 자꾸 하늘을 바라본다. 가난했지만 그의 눈빛은 무척 맑았다. 그러나 그 빨간 빛줄기

는 이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소년은 어머니를 숨길수만 있다면 숨기고싶었다. 그리고

소년은 더이상 하늘을 쳐다보는 일이 없었다. 여러 색채가 하나로 어울러진다. 그속에서

소년이 믿어왔던 용기와 정의의 초록빛도 리해와 용서라는 파랑빛도 옅어가기만 했다.

그리고 그가 느꼈던 고독과 권태의 보라빛과 욕망이라는 주황빛은 더욱 선명해졌다. 이

모든것이 하나로 어울려지면서 소년은 남자로 되여갔다.


“눈을 떠보세요. ”


녀자가 속삭이듯 말했다. 녀자의 싱그러운 웃음속에서 남자는 다시 태여나는 기분이 들

었다. 남자와 녀자는 마주보며 웃었다. 바다는 오후햇살을 받아서인지 유리조각들처럼

반짝반짝 눈부시다.



바람 9



P 병원 앞은 여느 때와 달리 이른 아침부터 북적거리고있다.


심드렁한 표정의 원장은 아까부터 애꿏은 대문을 발로 툭툭 차면서 가끔씩 언덕길을 흘

끔거리고있다. 마당에는 깨끗한 양복차림의 삐쩍 마른 로인이 의자에 앉은채 깊은 상념

에 빠져있다. 로인의 가면 같은 표정의 건조함과 캄캄한 공허함은 그의 황폐하고 늙은

얼굴을 더욱 그늘지게 만들었다. 그 옆에는 작달만하고 가녀린 체구의 녀인이 안절부절

못하며 연신 이마의 땀을 훔쳐내고있다. 녀인의 얼굴은 곰곰히 눈여겨보면 특별히 부자

연스러운 곳은 없다. 허나 그래서 오히려 부자연스러운것이다. 특히 부스스한 곱슬머리

에 두툼한 눈두덩은 어딘가 아슬아슬 위태로워 보였다.


이 시간이면 의례 뒤뜰에 모여 녀자의 그림을 구경하고있을 몇몇 환자들도 마당에서 멋

모르고 수근거리고있다. 계절을 알수 없는 날씨가 찌뿌듯한 더위를 우줄우줄 몰고 마당

안을 휘돌고있다.


“어, 저기 오네. 저기 옵니다!”


원장이 저 멀리 숲속을 가로질러 오는 하얀색 승용차를 가리키며 환호인지 야유인지 모

를 소리를 질렀다. 로인도 녀인도 환자들도 일제히 대문으로 향했다. 진녹색으로 우거진

숲을 지나 언덕길로 마치 한줄기 새하얀 빛이 다가오는듯싶었다. 차는 안개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도 한 정체를 알수 없는 희부연 빛을 발하면서 그렇게 환영처럼 가까와 온다.


돌연 녀인이 울음소리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녀인은 차가 다가올수록 이름 못할 공포가

엄습해옴을 느꼈다. 그것이 헤여지는것에 대한 두려움인지 아니면 헤여지지 않을것에

대한 외로움인지 그녀도 알수 없었다. 단 세상에 홀로 내버려진듯한 서글픔에 녀인은 역

시 가볍게 떨리는 로인의 손에 자기 손을 갖다 얹었다.


―언니에게 그림을 그려줄게요.


그때 느꼈던 녀자의 손은 지나치게 따뜻했다. 녀인은 그것이 더 슬펐고 화가 났다.


―당신이 제일 나빠.


녀인은 준비해온 서류봉투를 꽉 움켜쥐었다. 누구를 향하는 쓴웃음인지 허탈한 랭소가

그녀의 입가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사라졌다. 적당히 원망스럽고 안쓰러운, 시간을 거

슬러 돌아온 낯설면서도 익숙한 그리움이 녀인에게 다가오고있었다. 체념의 앙금이 또

다른 체념을 낳을것인지 아니면 기적같은 우연을 만들어갈것인지 누구도 알수 없는 일

이였다.


으스스 소슬바람이 불어온다. 세월도 회한도 모두 다 몰아오려는듯한 바람은 자신의 무

게가 버거운듯 시름겹게 너울거린다. 여러 겹의 시간안으로 여러 갈래의 빛깔이 흐르면

서 새하얀 빛줄기 같은 차는 어느덧 대문 앞에 이르렀다.


때는 벌써 이른 가을이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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